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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지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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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모토 지이치로는 일본의 부라쿠 해방 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1883년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1966년 사망했다. 그는 규슈 수평사 창립 및 전국 수평사 중앙위원회 의장을 역임하며 부라쿠 해방 운동을 이끌었으며, 중의원 의원과 참의원 부의원을 지냈다. 전쟁 시기에는 대정익찬회에 참여하고 전쟁 협력적인 발언을 하여 논란이 있었으며, 패전 후에는 군국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부라쿠 해방 동맹 초대 집행 위원장을 맡았으며, 일중우호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사회 활동을 펼쳤다. 그의 생애는 부라쿠 해방 운동의 중요한 족적을 남겼으나, 전쟁 협력, 돌팔이 의사 행위, 폭력단과의 연관성 등 여러 논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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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지이치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4년 마쓰모토
본명마쓰모토 지이치로 (松本 治一郎)
출생1887년 6월 18일
사망1966년 11월 22일
출생지후쿠오카현 지쿠시군 (筑紫郡) (현재의 후쿠오카시)
사망지불명
별칭오야지 (堂々たる顎髭の風貌から「オヤジ」と呼ばれ親しまれた。)
정치 경력
정당일본 사회당
기타 소속대정익찬회
전국수평사
국회의원중의원 의원 (1936년 ~ 1942년)
참의원 의원 (총 4선)
참의원 부의장1947년 5월 20일 ~ 1949년 2월 24일
주요 직책전국수평사 중앙위원회 의장
초대 부락 해방 동맹 집행위원장
초대 일중우호협회 회장
국회 경력
중의원임기 시작: 1936년 2월 21일
임기 종료: 1945년 12월 18일
선거구: 후쿠오카현 제1구 (중선거구)
당선 횟수: 3회
참의원임기 시작: 1947년 5월 3일, 1953년 5월 3일
임기 종료: 1949년 2월 24일, 1966년 11월 22일
선거구: 전국구제
당선 횟수: 4회
학력
출신 학교긴조 고등학교 중퇴
가족 관계
친척조카: 마쓰모토 에이이치 (참의원 의원)
양손자: 마쓰모토 류 (정치가) (에이이치의 장남)
질녀의 장녀의 남편: 나라자키 야노스케
질녀의 손자: 나라자키 긴야
기타 정보
전직마쓰모토 그룹 사장
소속 정당 변천사회대중당 (社会大衆党)
익찬정치회 (翼賛政治会)
무소속
일본사회당
무소속
좌파사회당 (左派社会党)
일본사회당

2. 생애와 경력

마쓰모토 지이치로는 1883년 현재의 후쿠오카시인 나카군 긴페이촌에서 부라쿠민의 아들로 태어났다.[17] 아버지 지키치는 나막신, 짚신신발 제조·판매의 부업과 중매상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19]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마쓰모토는 1900년 스미요시 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사숙인 카스야 학원과 교토의 구제 간성 중학교를 거쳐 상경하여 구제 긴죠 중학교를 중퇴했다.

1907년 다롄으로 건너가 길거리 역술가나 가짜 의사로 생계를 유지하다 1910년 일본 총영사에 의해 강제 송환되었다.[19] 1911년 토건업 마쓰모토 구미(松本組)를 창업하여 사업가로 성공했다. 부하에는 다카마쓰 야타로 등 규슈의 대표적인 폭력배들이 모여 있었으며, 후지타 고로의 「규슈 야쿠자자」에는 마쓰모토 구미가 적대 조직의 건물을 파괴했다는 기록이 있다.

2. 1. 초기 활동 (1920년대 ~ 1930년대)

마쓰모토 지이치로는 1923년 규슈 수평사를 창립하고 위원장을 맡았으며,[17] 1925년에는 전국 수평사 중앙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부라쿠 해방 운동을 이끌었다.[17] 그는 1926년부터 후쿠오카 연대 차별 사건의 규탄 투쟁을 지도했다.[17] 도쿠가와 막부에 차별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 그는, 1927년 도쿠가와 이에타다 공작에게 작위 반납 권고 투쟁을 지도했고,[17] 이 사건으로 4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17] 1929년에는 후쿠오카 연대 폭파 음모 사건으로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다시 투옥되었다.[17]

2. 2. 정치 활동과 전쟁 협력 논란 (1930년대 ~ 1940년대)

마쓰모토 지이치로는 1936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했다.[20] 1940년에는 사이토 다카오의 반군 연설에 의한 중의원 의원 제명에 반대하여 본회의를 결석했고, 사회대중당에서 당원 제명 처분을 받았다.[20] 1942년에는 익찬 정치 체제 협의회 추천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는데,[21] 이는 정부가 위장으로 강제 추천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2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마쓰모토는 대정익찬회에 참여하고 전쟁 협력적인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1942년 4월 익찬정치체제협의회(翼賛政治体制協議会)의 추천을 받아 출마했을 때, 선거 공보에서 "국가를 위해서는 피를 흘리자"라는 구호를 내걸었다.[30] 또한 "우리는 끝까지 미영을 타도하고, 앵글로색슨(アングロサクソン)의 세계 지배를 멸망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0] 1943년 6월 14일에는 천황주의적인 의원 단체인 "팔일회(八日会)" 결성에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참가하여,[31] 나카노 마사타케(中野正剛)와 아카오 빈(赤尾敏) 등과 함께 결성식에 참석하여 "격려 발언"을 했다.[32] "팔일회"는 "대동아전쟁(大東亜戦争)"의 개시일(1941년 12월 8일)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우리는 모든 행동을 국체(国体)의 본의에 따른다"는 신조를 내걸었다.[32] 제국 의회(帝国議会) 예산 위원으로서는 전시 예산 전부에 찬성하는 등 적극적으로 전쟁 협력을 했다.[33]

패전 후, 마쓰모토는 갑자기 군국주의를 비난하는 쪽으로 돌아서서, "나는 항상 반전적인 사상을 표명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34][35] 1953년 1월 미얀마 양곤에서 열린 시민 환영 대회에서는 "일본은 [...] 천황제(天皇制) 파시즘(ファシズム)에 의해 침략자로 변해 [...] 아시아(アジヤ)의 많은 나라에 막대한 희생과 손해를 입혔습니다"라고 연설하며 자신의 전쟁 협력 과거를 부정했다.[36]

이러한 마쓰모토의 행적에 대해, 기시모토 타카아키(吉本隆明)는 1971년 강연에서 부락 해방 동맹이 전쟁 중 "적극적으로 전쟁 수행의 이데올로기(イデオロギー)적 첨병으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성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37]

마쓰모토의 전쟁 협력에 대해서는 옹호론과 비판론이 공존한다. 옹호론은 부라쿠 해방 운동가로서 소수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는 주장을 펼치는 반면, 비판론은 마쓰모토가 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고 지적한다.

2. 3. 전후 활동과 부라쿠 해방 동맹 (1940년대 ~ 1960년대)

마쓰모토 지이치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부라쿠 해방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46년 부라쿠 해방 전국 위원회를 결성하고, 1955년 이를 부라쿠 해방 동맹으로 개칭하여 초대 집행 위원장을 맡았다.[21] 그는 부라쿠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얻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부라쿠 해방 운동을 이끌었다.

1947년 제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일본사회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초대 참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21] 그는 참의원 부의장 시절인 1948년 1월 21일 이른바 '게의 옆걸음 거부 사건'으로 알려진, 천황 알현을 거부하는 사건을 일으켰다.[24] 이는 그의 신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내각총리대신이 된 요시다 시게루에 의해 공직에서 추방되었으나, 1951년 복권되었다.[25]

1953년 일중우호협회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일본과 중국 간의 우호 증진을 위해 힘썼다.

1964년에는 훈일등 수여 대상자로 선정되었으나, "권력과 싸워 온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며 수상을 거부했다.[26]

마쓰모토 지이치로는 1966년 사망할 때까지 부라쿠 해방 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그의 묘소는 아오야마 묘원의 해방 운동 무명 전사 묘에 있다.

당락선거시행일선거구정당득표수득표율득표순위
/후보자수
비례구비례순위
/후보자수
제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47년 4월 20일전국구일본사회당415,494 4/258--
제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53년 4월 24일전국구좌파사회당368,985 7/234--
제5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59년 6월 2일전국구일본사회당426,586 22/123--
제7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65년 7월 4일전국구일본사회당548,022 27/99--
당선 횟수 4회 (참의원 4)


3. 논란

마쓰모토는 생전, 제10회 부락해방위원회 전국위원회 회의(1955년 8월 27-28일)에서 오사카부 연합 대표 니시키오리 키이치로부터 “마쓰모토가 천황제를 타도하지 않는 한 부락해방운동의 민주화는 불가능하다”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41] 오카 에이도 또한 “솔직히 말해 나는 전후 마쓰모토 위원장을 보고 니시키오리와 같은 심정이었다. 그것은 예를 들어 간토 지방을 지배했던 ‘에타두’ 단자에몬을 연상시키며, 오늘날 민주적인 운동의 지도자 인물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마쓰모토 위원장 자신도 강조했던 ‘인간에 의한 인간 지배를 타파한다’는 것이 조직 내에서도 위원장 자신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는 혐오감은, 니시키오리 키이치뿐만 아니라 대회 등에서의 횡포한 모습을 볼 때마다 누구나 가졌던 것이다”, “마쓰모토 지이치로 위원장은 신격화되어 수평운동에서 특석, 즉 그가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던 천황과 같은 높은 자리(다카미쿠라)에 앉아 있었다”[41]고 말하고 있다.

다롄 체류 당시 "일본 제국 육군 1급 군의관"을 사칭하며 의사 행위를 했다는 논란이 있다.[1][27] 김정미(金靜美)는 마쓰모토가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에 비판적이었다면 이러한 직함을 사칭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중국인에 대한 차별 의식이 있었다고 비판한다.[28] 마쓰모토는 "타진이나 청진을 할 수 없지만, 지금도 시진에는 큰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3][29]

1942년 마쓰모토 지이치로는 대정익찬회 후보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는데, 당시 그의 선거 공보에는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리자!", "미국을 섬멸하고 영국계 백인의 세계 지배를 무너뜨리자!"와 같은 전쟁 협력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4][30] 1943년에는 천황주의적 의원 단체인 "팔일회(八日会)" 결성에 참여하여,[5][31] "모든 행동을 국체의 본의에 따른다"는 신조 아래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33] 그러나 패전 후, 마쓰모토는 갑자기 군국주의를 비난하며 "나는 항상 반전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9], "나는 반군국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이다"[35]라고 주장했다. 1953년 미얀마 양곤에서 열린 시민 환영 대회에서는 "일본은 제국주의 파시즘의 위험으로 인해 많은 나라를 희생시켰다"라고 연설하며,[10][36] 자신의 전쟁 협력에 대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타즈케 비행장 확장을 예상하고 주변 토지를 매점매석하여 이를 공항 용지로 국가에 임대하였다. 지권자의 톱인 마쓰모토 일족 등에게 지급되는 연간 지대 총액은 80억 엔에 달한다고 한다.[38] 후쿠오카 공항의 토지 건물 임대료는 일본 전국의 공항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고액이다.[39]

메이지 시대부터 후쿠오카에서 활동해 온 폭력단 "우메즈카이"의 초대 두목 우메즈 고지로의 동생이었다.[40] 우메즈는 후쿠오카현 수평사의 초대 위원장이었으며, 하카타 마이니치 신문사 습격 사건의 중심 인물이기도 하다. 하카타 마이니치 신문사 습격 사건은 1916년 6월, 부락민 400명 이상이 하카타 마이니치 신문사의 기사에 분개하여 동사를 습격하여 유리를 깨고 활자대를 뒤엎고 책상과 의자를 던지는 소동이 되어 인쇄공 1명이 부상을 입고, 소요죄로 체포되어 47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주모자 3명이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사건이다.[40]

3. 1. "돌팔이 의사" 논란

마쓰모토 지이치로(松本 治一郎)는 다롄 체류 당시 "일본 제국 육군 1급 군의관"을 사칭하며 의사 행위를 했다는 논란이 있다.[1][27] 김정미(金靜美)는 마쓰모토가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에 비판적이었다면 이러한 직함을 사칭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중국인에 대한 차별 의식이 있었다고 비판한다.[28] 마쓰모토는 "타진이나 청진을 할 수 없지만, 지금도 시진에는 큰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3][29]

3. 2. 전쟁 협력 논란

1942년 마쓰모토 지이치로는 대정익찬회 후보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는데, 당시 그의 선거 공보에는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리자!", "미국을 섬멸하고 영국계 백인의 세계 지배를 무너뜨리자!"와 같은 전쟁 협력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4][30] 1943년에는 천황주의적 의원 단체인 "팔일회(八日会)" 결성에 참여하여,[5][31] "모든 행동을 국체의 본의에 따른다"는 신조 아래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33]

그러나 패전 후, 마쓰모토는 갑자기 군국주의를 비난하며 "나는 항상 반전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9], "나는 반군국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이다"[35]라고 주장했다. 1953년 미얀마 양곤에서 열린 시민 환영 대회에서는 "일본은 제국주의 파시즘의 위험으로 인해 많은 나라를 희생시켰다"라고 연설하며,[10][36] 자신의 전쟁 협력에 대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3. 3. 후쿠오카 공항 이권 문제

이타즈케 비행장 확장을 예상하고 주변 토지를 매점매석하여 이를 공항 용지로 국가에 임대하였다. 지권자의 톱인 마쓰모토 일족 등에게 지급되는 연간 지대 총액은 80억 엔에 달한다고 한다.[38] 후쿠오카 공항의 토지 건물 임대료는 일본 전국의 공항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고액이다.[39]

3. 4. 폭력단과의 관계

메이지 시대부터 후쿠오카에서 활동해 온 폭력단 "우메즈카이"의 초대 두목 우메즈 고지로의 동생이었다.[40] 우메즈는 후쿠오카현 수평사의 초대 위원장이었으며, 하카타 마이니치 신문사 습격 사건의 중심 인물이기도 하다. 하카타 마이니치 신문사 습격 사건은 1916년 6월, 부락민 400명 이상이 하카타 마이니치 신문사의 기사에 분개하여 동사를 습격하여 유리를 깨고 활자대를 뒤엎고 책상과 의자를 던지는 소동이 되어 인쇄공 1명이 부상을 입고, 소요죄로 체포되어 47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주모자 3명이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사건이다.[40]

4. 사상과 신념

마쓰모토 지이치로는 "폭력도 없고, 표적도 없다"[11], "귀족이 있는 곳에는 천족이 있다"[49][12]라는 발언을 통해 평등주의와 반권위주의적인 신념을 드러냈다. 그는 "술은 마시지 않는다.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도박을 하지 않는다. 결혼하지 않고, 여성을 사지 않는다.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50][13]는 원칙을 평생 지켰다고 알려져 있다. 젊은 시절에는 술꾼이자 헤비 스모커였으나, 30대 중반 구류를 계기로 금주와 금연을 결심했다.[51]

그는 훈일등 수훈을 거부하며 "권력과 싸워 온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천황으로부터 서훈식이나 친수식 같은 것을 할 수 있다면, 이 마쓰모토의 투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훈장을 탐내고, 권위를 휘두르려 한다. 이러한 생각이 부락 차별을 남기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26]라고 말하며 권위에 대한 저항 정신을 보여주었다. 또한, "내가 싸워 온 상대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배후에 있는 것이다. 당신이 잘못했다고 반성하고 있다면 그걸로 좋다"[52]라는 발언에서 그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침략하지 않고 침략받지 않는다(侵さず侵されず)"[48]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5. 가족 관계

마쓰모토 지이치로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조카 마쓰모토 에이이치를 양자로 삼아 자신이 창업한 토건업체 마쓰모토 그룹을 계승하게 했다.[42] 에이이치는 지이치로 사후 참의원이 되었다. 에이이치의 아들 마쓰모토 류는 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지이치로의 동생 마쓰모토 유조는 마쓰모토 그룹 사장이다.

나라사키 야스노스케는 차별받는 부락 출신은 아니었지만 지이치로의 조카딸과 결혼했다.[43] 그의 아들이 중의원 의원 나라사키 긴야이다.[43]

지이치로의 여동생은 지이치로의 오른팔이자 전국 수평사 서기국장, 부락해방전국위원회 서기장을 지낸 이모토 린지와 결혼했다.[44][45] 노모토 다케이치의 장녀는 이모토의 조카와 결혼했다.[44]

지이치로의 조카는 마쓰모토 그룹 지배인 야마다 혼조의 아내였다.[46] 혼조의 여동생은 키타하라 타이사쿠의 아내였다.[46]

마쓰모토 키치노스케(전 규슈 수평사 지도자, 후쿠오카현 의회 의원)의 아내의 삼촌은 시바타 케이조(전 규슈 수평사 창립 멤버 중 한 명)의 아버지였다.[47] 또한 마쓰모토 키치노스케의 매형은 하나야마 키요시(전 규슈 수평사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자 후쿠오카현 의회 의원)이다.[47] 하나야마 키요시의 친척에 전 규슈 수평사의 타카오카 쇼조가 있는데, 쇼조의 아내는 마쓰모토 지이치로의 친여동생이다.[47]

6. 평가

마쓰모토 지이치로는 부라쿠 해방 운동의 선구자이자 지도자로서, 차별 철폐와 평등 사회 건설에 큰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전쟁 협력, 돌팔이 의사 행위, 후쿠오카 공항 이권 문제, 폭력단과의 관계 등 여러 논란으로 인해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의 생애와 활동은 일본 근현대사의 복잡성과 모순을 보여주는 사례로,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될 수 있다.

1955년 8월 27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제10회 부락해방위원회 전국위원회 회의에서 오사카부 연합 대표 니시키오리 키이치는 "마쓰모토가 천황제를 타도하지 않는 한 부락해방운동의 민주화는 불가능하다"고 비판했다.[41] 오카 에이 또한 "솔직히 말해 나는 전후 마쓰모토 위원장을 보고 니시키오리와 같은 심정이었다. 그것은 예를 들어 간토 지방을 지배했던 ‘에타두’ 단자에몬을 연상시키며, 오늘날 민주적인 운동의 지도자 인물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마쓰모토 위원장 자신도 강조했던 ‘인간에 의한 인간 지배를 타파한다’는 것이 조직 내에서도 위원장 자신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는 혐오감은, 니시키오리 키이치뿐만 아니라 대회 등에서의 횡포한 모습을 볼 때마다 누구나 가졌던 것이다", "마쓰모토 지이치로 위원장은 신격화되어 수평운동에서 특석, 즉 그가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던 천황과 같은 높은 자리(다카미쿠라)에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41]

7. 기타

7. 1. 저서

마쓰모토 지이치로는 여러 저서를 남겼다. 1937년 1월에는 기타하라 타이사쿠가 출판한 《제69회 특별국회 투쟁 보고서》가 있다. 1948년 9월에는 근대사상사에서 《부락 해방으로의 30년》을 출판했다. 1956년 6월에는 해방신문사에서 《서유럽·북아프리카·중근동을 돌아다니며 ――민족 해방의 숨결――》을 출판했다. 1977년 3월에는 해방출판사에서 《마쓰모토 지이치로 대담집 불가침불가피침》을 출판했다.

7. 2. 동상

후쿠오카현 부라쿠 해방 센터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참조

[1] 서적 松本治一郎伝 解放出版社 1987
[2] 서적 水平運動研究史──民族差別批判 現代企画室 1994
[3] 서적 松本治一郎 西日本新聞社 2003
[4] 서적 水平運動研究史──民族差別批判 現代企画室 1994
[5] 서적 水平運動研究史──民族差別批判 現代企画室 1994
[6] 간행물 特高月報 1943-06
[7] 서적 水平運動研究史──民族差別批判 現代企画室 1994
[8] 서적 荊冠旗は血に染む 水平社運動廿五年 ジープ社 1947-09
[9] 서적 部落解放への三十年 近代思想社 1948
[10] 간행물 全アジア水平運動のために ビルマから インドへ 1953-02
[11] 서적 部落解放新書1・松本治一郎対談集 解放出版社
[12] 서적 部落の歴史―物語・部落運動解放史 理論社
[13] 서적 松本治一郎 西日本新聞社 2003
[14] 서적 松本治一郎 西日本新聞社 2003
[15] 서적 松本治一郎 西日本新聞社 2003
[16] 웹사이트 【建設】松本龍氏落選の衝撃~建設業界の変化に左右された福岡1区 http://ib-kensetsu.j[...] ネットアイビーニュース 2012-12-20
[17] 서적 部落問題・水平運動資料集成
[18] 서적 西日本人物誌(16) 松本治一郎
[19] 서적 西日本人物誌(16) 松本治一郎
[20] 서적 水平記 新潮文庫
[21] 서적 世界伝記大事典5 日本・朝鮮・中国編 ほるぷ出版 1978
[22] 잡지 折節の記 2011-09
[23] 서적 松本治一郎伝
[24] 서적 増補新版 現代世相風俗史年表 昭和20年(1945)-平成20年(2008) 河出書房新社 2003-11-07
[25] 서적 近代日本総合年表 第四版 岩波書店 2001-11-26
[26] 서적 松本治一郎
[27] 서적 松本治一郎伝
[28] 서적 (저자 미상)
[29] 서적 松本治一郎
[30] 서적 水平運動史研究──民族差別批判
[31] 서적 (저자 미상)
[32] 간행물 特高月報 1943-06
[33] 서적 (저자 미상)
[34] 서적 荊冠旗は血に染む 水平社運動廿五年 ジープ社 1947-09
[35] 서적 部落解放への三十年 近代思想社 1948
[36] 간행물 全アジア水平運動のために ビルマからインドへ 1953-02-00
[37] 講演 『世界─民族─国家』空間と沖縄 弓立社 1989-00-00
[38] 간행물 折節の記 2011-09-00
[39] 웹사이트 グラフで見る空港別収支の内容 http://airline.skr.j[...]
[40] 서적 公安百年史: 暴力追放の足跡 : 極左・極右・暴力団総会屋資料の最新版 公安問題研究会 1978-00-00
[41] 서적 荊冠記
[42] 서적 部落問題・水平運動資料集成
[43] 서적 遺言・楢崎弥之助…命ひとすじ
[44] 서적 解放への飛翔 部落解放同盟埼玉県連合会
[45] 웹사이트 井元 麟之 https://kotobank.jp/[...]
[46] 서적 賎民の後裔-わが屈辱と抵抗の半生-
[47] 서적 筑豊に生きる
[48] 서적 部落解放新書1・松本治一郎対談集 解放出版社
[49] 서적 部落の歴史―物語・部落運動解放史 理論社
[50] 문서 松本治一郎
[51] 문서 松本治一郎伝
[52] 문서 松本治一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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